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까.

 

남자는 색이 얼룩덜룩한 화선지를 바라보면서도 먹을 찍은 붓을 움직이지 못했다. 남자가 아무리 무관이라고 하여도, 글을 쓴다고 하였을 때, 머리가 이렇게 하얗다고 할 정도로 비어본 적은 없었는데, 머리가 하얗고 손이 떨린다. 어떤 것부터 대답을 해야 할까. 남자는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천천히 생각하다가, 그 동안 주고받은 수많은 질문들로 생각을 돌렸다.

 

어쩌다가 나쁜 꿈을 꾸게 되었는지, 그것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대가 준 편지를 어떻게 맞추었는지 이야기를 해야 할까.

어설프게 말을 흐린 질문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해야 할까.

소중하다는 장간죽을 그리 쉽게 내어준 이유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해야 할까.

 

말의 서두를 화선지에 적으려다 남자는 다시 손을 멈췄다. 붓에서 먹물이 떨어져 눈물자국처럼 화선지의 위에 검게 번져나갔다. 검게 번져나가는 먹을 남자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붓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편지로 마음을 전한다는 것은 남자에게는 영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남자는 품에 화선지 몇 장을 고이 품었다. 화선지는 조심스러운 필체로 쓰인 편지였다.

남자는 고이 품었던 편지를 펼쳤다. 눈을 편지의 위로 두고서는 눈동자를 굴렸다. 아랫입술을 깨물고서는 편지 위에 손을 가져다대어 조심스레 글자를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짧게 웃음 지었다. 웃음의 의미는 허탈함이었다. 남자는 다시 붓을 들었다. 마음을 전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가 편지의 답장을 바랐는지는 몰라도, 편지의 답장 정도는 하고 싶었다. 남자는 이미 펼쳐진 화선지 외에 두 장의 화선지를 더 꺼내었다.

 

아무것도 아닌 별에게, 달이 사모라는 이름 붙여줬으니, 이제 그 별은 달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무관인 것이 글을 쓸 때처럼 안타까울 때는 없었다. 남자는 먹을 묻힌 화선지를 한 편에 접어두었다. 남자는 소매 춤에서 장간죽을 꺼내 입에 물었다. 차마 불은 붙이지 못하였다. 다시 한 번 소매 춤을 뒤적거리다가 곱게 장식되어있는 붉은 머리끈을 꺼내 화선지의 옆에 두었다.

 

쓰시지요. 손대기도 애처롭고, 바라보기도 가슴 아픈 것이 그대라지만, 이렇게라도 손길을 닿고 싶었습니다.

 

남자는 화선지의 옆에 두었던 머리끈을 화선지의 안에 넣고 그것 또한 접어서 한 편에 놓아두었다. 마지막 한 장의 화선지를 앞에 두고 남자는 망설임 없이 붓을 그었다.

 

연모하는 이여, 내 무엇을 더 마음 담은 것을 주어야 하나. 흘러넘치는 마음을 담으려하니, 손에 닿으면 욱신거리고 눈물이 차올라 더 이상 담을 수가 없었네. 그대와 함께 하는 말 한 마디가 이렇게 그리운데, 해는 왜 이렇게 빨리 도망가버리나. 그대는 어디로 도망가버렸나. 그리움이 입을 틀어막아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하네.

 

마지막 화선지까지 접어놓은 남자는 그것을 검은색의 주머니에 넣었다. 어디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남자는 발길이 가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이 무슨 장난을 치는 것인지, 그는 거기서 익숙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남자는 한 걸음씩 다가가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같았다. 또 장간죽을 물었다 이야기 하시겠지. 혹은 어떻게 여기 왔는지 물을 수도 있겠지. 남자는 숨을 멈추고서는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떴다. 그리고 그를 불렀다.

 

무얼 하십니까?”

 

그는 웃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간죽을 건네받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어설피 묶은 머리카락이 하늘거렸나. 남자는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는 이것이 무엇이냐 묻고, 남자는 다시 말을 흐렸다. 그러다 말의 서두를 때었다.

 

연회의 마지막 날이니, 그대와 하던 질답을 끝내려고 이리 왔습니다.”

 

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표정을 보지 못하고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무엇부터 대답해야하는지 채 결정을 못한 상태였다. 입을 작게 열었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하다가 남자는 말했다.

 

그대가 주었던 편지를 맞춘 까닭은, 제가 주상께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대에게 받고 싶다고. 나쁜 꿈을 꾸게 된 이유는, 그대가 내 옛 일을 생각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장간죽을 쉽게 내어준 까닭은 그대 또한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어설프게 말을 흐린 질문은, 절 좋아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안았다가 다시 놓았다. 남자는 그의 두 손을 떨리는 손으로 부여잡고, 조용히 전했다.

 

내가 그대를 연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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