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아라
눅진하게 젖은 공기가 숨을 죄어왔다. 장마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빗소리가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고 우울감에 빠지도록 천천히 유도한다. 답지 않은 우울은 예상보다 길게 이어지는 장마가 불러온 것이라고 아라키타 야스토모는 생각했다. 젖은 담배에 아무리 성냥불을 갖다 대더라도 불이 붙지 않는 것처럼 저도 감정에 젖어 불이 붙지 않는 것이라고, 감정이 마르면 금세 평소의 텐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쉽사리 단정했다.
발끝을 타고 감정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은 겨울방학이 끝나가는 2월이었다. 스며들었다는 표현보다 빠졌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단조롭고 급격한 짝사랑에 몸이 무너져 수습할 수 없었다. 술을 찾고, 저를 찾는 아라키타의 행동에 킨조 신고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본래 그런 남자였다. 진중하고 말이 없고, 사람을 신뢰하는. 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그것을 게워내는 와중에도 킨조는 아라키타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신물이 올라와 목을 태우고 텅 비워진 위장이 쓰라린 고통보다도 절 지켜보는 킨조의 시선에 한 치의 의문도 없다는 것이 아라키타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 저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는 게 사람을 이정도로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아라키타는 생전 처음 알게 되었다. 너는, 내가 왜 이러는지 안 궁금하냐? 쓰레기에 파묻혀 먹은 것을 모조리 뱉어내는 와중에 아라키타는 물었고 킨조는 말했다. 너에게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언젠간 말해주겠지. 아라키타는 생각했다. 개새끼.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냐고 물으면 아라키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라키타는 그 이후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킨조를 부르는 일도 드물어졌다. 연구실에 처박혀서 교수를 도와주거나 쓸모없는 논문 따위를 쓰거나, 끝낸 과제를 손보는 게 전부였다. 킨조 또한 비슷한 시기에 과의 일이 바빠졌기에 아라키타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킨조는 여러 방면으로 물리학과의 유명인이었다. 고등학교 동창도 아닌, 그저 면식이 있었고 대회에서 같이 달린, 그런 정도의 인연 하나가 찾지 않는다고 하여 서운해질 무언가도 없었다. 같은 대학에 다니게 된 것은 우연일 뿐이었다.
아라키타가 다시 킨조를 부른 것은 장마가 잦아들기 시작한 8월이었다. 며칠 동안 폭우가 쏟아지다가 그친 날이었다. 아라키타는 주소록에서 킨조의 전화번호를 찾으려다가 다이얼을 누르는 것이 훨씬 빠르다는 걸 깨닫고 한 자, 한 자 손수 번호를 입력해 전화를 걸었다. 킨조는 신호음이 두 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나, 누구세요도 아닌 다른 말이 아라키타의 귓바퀴를 타고 고막으로 흘러들었다. 마침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는데. 킨조의 말에 아라키타는 일말의 기대감도 품지 않았다. 품을 이유가 없었다. 킨조는 아라키타에게 오늘 저녁, 시간이 되면 캔맥주라도 마시지 않겠냐고 물었고, 아라키타는 좋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 용건이 있어서 전화를, 별 거 아니고, 그냥 술이나 마시자고. 이따 보자. 아라키타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운동장 근처 벤치가 적당히 말라있었다. 킨조는 맥주캔 서너 개가 담긴 봉투를 흔들며 벤치에 앉았다. 먼저 앉아있던 아라키타에게 오랜만이라는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라키타는 짧은 대답과 함께 캔 하나를 집어 들고 킨조의 말을 기다렸다. 킨조가 뱉은 말은 예상 외로 별 것이 아니었다. 비가 그쳐서, 달이 환하게 뜰 거라고 생각했어. 혼자 보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렇게 낭만적인 면모가 있는 줄 몰랐다며 아라키타는 비아냥대다가 예쁜 줄은 모르겠지만 정말로 달이 환하기는 하다며, 긍정했다. 킨조는 이어서 바빠 보였는데 생각보다 선뜻 나온다고 해줘서 놀랐다는 말도 전했고, 아라키타는 대답했다. 달보다는 네가 보고 싶었거든. ……농담을 좋아하는 성격인 줄은 몰랐는데. 킨조의 말에 아라키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농담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킨조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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